실리콘밸리 테크 회사들이 어떻게 태어나 성장했는지는 나의 큰 관심사이고 블로그에서도 자주 다루는 내용이다. 하지만 꼭 테크업계에서만 이런 창업과 혁신의 스토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업계에서도 흥미로운 창업 이야기는 많다. 그 중 오늘날 명품 브랜드가 된 회사들이 처음 시작된 이야기에서는 실리콘밸리의 테크 회사들 만큼이나 남들과 다르게 생각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번 블로그에서는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그 이야기들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1. 루이비통 (Louis Vuitton)
루이비통은 1800년대 프랑스 궁정에서 상류층들의 짐을 꾸리는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당시에 사용하던 볼록한 모양의 가방은 마차에 여러개를 쌓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개선하기 위해 루이비통은 쌓기 좋은 튼튼한 사각형 여행용 가방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디자인은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의 큰 호응을 얻었고 이 가방에 대한 수요는 선박과 열차와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여행용 가방에서 시작한 루이비통은 다양한 크기와 디자인의 가방을 파는 브랜드로 성장하게 된다. 짐싸는 사람의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 오늘날 최고의 명품 브랜드인 LVMH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루이비통은 1800년대 프랑스 궁정에서 상류층들의 짐을 꾸리는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당시에 사용하던 볼록한 모양의 가방은 마차에 여러개를 쌓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개선하기 위해 루이비통은 쌓기 좋은 튼튼한 사각형 여행용 가방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디자인은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의 큰 호응을 얻었고 이 가방에 대한 수요는 선박과 열차와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여행용 가방에서 시작한 루이비통은 다양한 크기와 디자인의 가방을 파는 브랜드로 성장하게 된다. 짐싸는 사람의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 오늘날 최고의 명품 브랜드인 LVMH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2. 샤넬 (Chanel)
가난한 고아였던 가브리엘 코코 샤넬이 의상 디자인을 시작한 1900년대 초 프랑스 여성의 의상은 화려하지만 매우 불편한 의상들이었다. 이런 패션과 정반대로 샤넬은 여성들에게 활동성과 자유로움을 주는 실용적인 의상을 만들었다. 모자에 화려한 장식을 리본으로 바꾸고 여성들을 위한 바지 정장을 만드는 등 기존의 관습을 과감하게 바꾸었다. 그래서 샤넬의 패션은 화려함과 대조되는 Poor Look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화려함보다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샤넬 패션의 대표적인 예는 오드리 햅번 때문에 더 유명해진 Little Back Dress일 것이다. (사진) 오늘날 명품 브랜드인 샤넬의 시작이 실용성이라는 점은 재미있는 사실이고 샤넬은 "나는 여성의 몸에 자유를 주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가난한 고아였던 가브리엘 코코 샤넬이 의상 디자인을 시작한 1900년대 초 프랑스 여성의 의상은 화려하지만 매우 불편한 의상들이었다. 이런 패션과 정반대로 샤넬은 여성들에게 활동성과 자유로움을 주는 실용적인 의상을 만들었다. 모자에 화려한 장식을 리본으로 바꾸고 여성들을 위한 바지 정장을 만드는 등 기존의 관습을 과감하게 바꾸었다. 그래서 샤넬의 패션은 화려함과 대조되는 Poor Look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화려함보다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샤넬 패션의 대표적인 예는 오드리 햅번 때문에 더 유명해진 Little Back Dress일 것이다. (사진) 오늘날 명품 브랜드인 샤넬의 시작이 실용성이라는 점은 재미있는 사실이고 샤넬은 "나는 여성의 몸에 자유를 주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3. 에르메스 (Hermes)
티에리 에르메스는 1800년대 파리에서 마차에 쓰이는 가죽 용품과 장식을 만드는 피혁공이었다. 하지만 마차를 대신하는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사업 모델을 가방과 핸드백으로 바꾸어 최고의 가족 제품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에르메스의 시작이다. 마차가 없어진다는 시대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결과가 오늘날 최고의 명품 브랜드를 만든 것이고 에르메스 로고가 마차인 이유도 여기 있다. (사진) 가죽 제품에 그치지 않고 계속 혁신하는 에르메스가 성공시킨 또 다른 제품은 유명한 에르메스의 실크 스카프인 에르메스 까레이다. 개인적으로는 에르메스의 타이를 무척 좋아한다.
티에리 에르메스는 1800년대 파리에서 마차에 쓰이는 가죽 용품과 장식을 만드는 피혁공이었다. 하지만 마차를 대신하는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사업 모델을 가방과 핸드백으로 바꾸어 최고의 가족 제품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에르메스의 시작이다. 마차가 없어진다는 시대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결과가 오늘날 최고의 명품 브랜드를 만든 것이고 에르메스 로고가 마차인 이유도 여기 있다. (사진) 가죽 제품에 그치지 않고 계속 혁신하는 에르메스가 성공시킨 또 다른 제품은 유명한 에르메스의 실크 스카프인 에르메스 까레이다. 개인적으로는 에르메스의 타이를 무척 좋아한다.
4. 크리스챤 디올 (Christian Dior)
크리스챤 디올의 경우는 처음부터 대박이 난 경우로 1947년 그가 파리에서 연 첫 컬렉션에서 선보인 New Look은 그의 이름을 단번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사진) 좁고 가는 어깨와 허리에 풍성한 치마 디자인이 특징인 디올의 뉴룩은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다시 화려한 의상을 입고 싶어한 시대를 잘 반영했다고도 한다. 그 후에도 디올은 H라인, A라인, Y라인 등 패션계의 거장으로 군림하다가 57년 갑자기 죽는다. 디올이 죽은 후에 그의 후계자로 크리스챤 디올의 컬렉션을 담당한 사람은 당시 20살이었던 이브 생 로랑이었다. 그 후 독립한 이브 생 로랑의 디자인은 원색을 많이 쓰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그가 어린 시절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영향이라고 알려져 있다.
크리스챤 디올의 경우는 처음부터 대박이 난 경우로 1947년 그가 파리에서 연 첫 컬렉션에서 선보인 New Look은 그의 이름을 단번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사진) 좁고 가는 어깨와 허리에 풍성한 치마 디자인이 특징인 디올의 뉴룩은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다시 화려한 의상을 입고 싶어한 시대를 잘 반영했다고도 한다. 그 후에도 디올은 H라인, A라인, Y라인 등 패션계의 거장으로 군림하다가 57년 갑자기 죽는다. 디올이 죽은 후에 그의 후계자로 크리스챤 디올의 컬렉션을 담당한 사람은 당시 20살이었던 이브 생 로랑이었다. 그 후 독립한 이브 생 로랑의 디자인은 원색을 많이 쓰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그가 어린 시절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영향이라고 알려져 있다.
5. 페라가모 (Ferragamo)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이태리에 농부 아들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구두를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더 좋은 구두를 만들기 위해 페라가모는 미국으로 와서 해부학 공부를 하면서 발 모양을 연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발이 가장 편한 구두를 만들기 시작했다. 1929년 다시 이태리로 돌아온 페라가모는 피렌체에 정착해서 구두를 만들었고 그 명성을 인정받아 오늘날의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했다. 디자인만이 아닌 착용감이 좋은 구두를 만든 것이 페라가모가 성공한 원인이다. 가장 대표적인 페라가모의 구두는 Vara인데 40년 이상 사랑받고 있는 구두 라인이다. (사진)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이태리에 농부 아들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구두를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더 좋은 구두를 만들기 위해 페라가모는 미국으로 와서 해부학 공부를 하면서 발 모양을 연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발이 가장 편한 구두를 만들기 시작했다. 1929년 다시 이태리로 돌아온 페라가모는 피렌체에 정착해서 구두를 만들었고 그 명성을 인정받아 오늘날의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했다. 디자인만이 아닌 착용감이 좋은 구두를 만든 것이 페라가모가 성공한 원인이다. 가장 대표적인 페라가모의 구두는 Vara인데 40년 이상 사랑받고 있는 구두 라인이다. (사진)
많은 내용은 "패션과 명품"이란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에게는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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